엄마는 어린 시절 나의 유별남을 설명할 때 꼭 ‘빨간 바지 사건’을 언급했다.
유치원을 다녔을 무렵, 엄마는 친구들 모임에 나를 곧잘 데리고 다녔다. 또래의 남자애들처럼 극성맞지 않았고, 엄마들의 수다를 조용히 듣다 킥킥 대며 제 할 일, 장난감을 갖고 놀거나 동화책을 읽는 애였으니 손이 많이 가지 않았다.
엄마가 자주 보던 친구 셋 중 한 아줌마는 ‘잘 사는 아줌마’였다. 남편이 사업을 한다고 했던가. 잘 살고 못 산다는 건 조금만 사리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집에는 있는 것이 우리집엔 없고, 우리집엔 없는 것이 그 집엔 있었다. 그 ‘있고 없고’에 근사한 장난감라도 끼어 있다면 금세 깨닫는 일이었다.
‘빨간 바지 사건’의 날, 모임 장소는 잘 사는 아줌마네 근처 백화점이었다. 나는 백화점에 처음 가 봤다. 처음이 아니었어도 그 백화점이 유독 휘황찬란해서, 이제부터 내 사전 속 ‘백화점’은 이것이라고 정했을 것이다. 아줌마는 어린 내가 봐도 멋진 옷을 입었고, 백화점을 자주 다닌 듯 그 공간을 거니는 모습이 능숙했다. 나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 아줌마네 집에서 태어났으면 나도 백화점에 자주 왔을까?’ 하고 언뜻 생각했다.
엄마와 친구들은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에서 회전초밥을 먹었다. 회전초밥 레일을 처음 본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초밥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회전초밥 코너의 모습은 어두운 밤의 회전목마처럼 미화되어 기억에 남아 있다. 너무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많이 보면 나는 불안해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날의 나도 그랬을까?
주광색 조명 아래 도는 회전초밥 레일을 들여다보던 회상의 앵글은, 갑자기 백화점 플로어에서 소리를 지르며 우는 나로 옮겨진다. 나는 그렇게 우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마 여섯 살이었을 나도 다 울고 나선, “이건 드문 일이에요.”라고 말했을 정도로. 원인은 빨간색 바지였다. 정확히는 레깅스, 쫄바지였는데, 구경이나 하자며 돌아보던 아동복 코너에서 그것을 발견한 나는 홀린 듯 사달라고 떼를 썼다.
곤혹스러운 엄마는 나를 심하게 다그쳤다. 비싸서라기보다는, 가뜩이나 여자애 같아 걱정인 나에게 여자애 옷으로 나온 빨간 레깅스를 입힐 순 없었다. 엄마는 여자애들이 갖고 노는 인형도 절대 사주지 않았다. 엄마의 친구들은 안쓰러웠는지,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는지 “하나 사줘라”, “내가 사줄게”라고도 했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나를 나무랐고,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바닥에 뒹굴며 우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나는 서러움에 발을 더 힘차게 굴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 손에 쥐어진 것은 변신하는 필통이었다. 잘 사는 아줌마의 선물이었다. 필통의 각 부분을 누르면 연필깎이가, 지우개 넣는 수납공간이 툭툭 튀어나오는 로봇 형태의 필통. 빨간 바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흡족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회상은 아마 내가 필통을 누르고 집어넣고 누르고 집어넣느라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을, 엄마의 얼굴을 비춘다.
엄마는 그때 무슨 마음이었을까. 내가 유별난 아이인 건, 걸음마 떼고 말을 하면서부터 알았을 것이다. 나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여자애들과 노는 걸 좋아하고 편해했고, 로봇 놀이보다는 인형 놀이가, 술래잡기보다는 소꿉놀이가 좋았다. 가르치지도 않은 여자애들의 앙탈을 부리는 날 보며, 엄마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빨간 바지를 안 입혀서 조금은 인심했을까. 내가 자라날 앞날을 생각하며 걱정이 늘었을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내 옷장에는 빨간 바지만 없을 뿐 주황색도, 연두색도, 분홍색도 있다. 엄마는 나의 유난스러움을 말할 때 빨간 바지를 언급하지 않은 지 오래다. 나도 엄마도 그런 얘길 할 나이는 지나버렸다. 그때는 도드라졌던 유별남이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하고 사는 무관심이 되기까지, 꽤 험난한 길이 있었다. 내 마음은 없는 기억을 다시 비춘다. 그 자라는 과정 속에서 엄마는 무슨 표정이었을까. 엄마, 다시 돌아가면 빨간 바지, 나 사줬을 거야? 다음번에 엄마를 보면 꼭 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