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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was a word

결혼의 의미를 국가 유지를 위한 프로파간다로 보는 비혼 염세주의자에게 결혼식 축사 부탁이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하나, 네이버 블로그의 축사 꿀팁들을 보다 지쳐 '걍' 쓰기로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OOO, ㅁㅁㅁ의 친구 XXX입니다.

오늘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깊은 자리에 축사를 전할 수 있어 기쁜 한 편,
결혼 0회차 비혼주의 싱글인 친구에게 굳이 굳이 축사를 부탁한 두 사람의 저의가 의심되는 바이지만, 지금 티 없이 맑게 웃고 있는 두 얼굴을 보고 있자니, 두 사람의 만남부터 오늘 이 자리까지 수어 번의 다툼과 단기 헤어짐의 양측간 변호인이자, 메시지 전하는 비둘기로 암약해 온 저에게 주는 마지막 임무가, 바로 이 축사,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온 힘을 다해 축하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되어 의심은 내려놓고 하객 여러분만큼 벅찬 마음으로 축사를 읽어보려 합니다.

결혼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두 사람의 수백 번째 다툼 중 들었던 말, 죄송합니다. 앞에서는 수어번이라 하였는데, ‘쟤는 나 없으면 안 돼’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토씨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서로에 대한 믿음을, 그렇게 믿는다면 제게 말하지 말고 직접 대화로 풀었으면 했습니다만, 자랑했는데요. 어쩌면 결혼은 본인 스스로는 모르는 부족한 점, 비어 있는 구석을 사랑하는 이에게 가감 없이 들키고 저당 잡히는 일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살다 보면 맑은 날만 있지 않고 비가 궂게 내리는 날,
찬 바람이 사정없이 내리꽂히며 용기를 잃게 하는 날도 있을 텐데요. 그럴 때 이 두 사람은 서로 ‘저 사람은 나 없으면 안 된다’라는 마음으로 손을 맞잡고 젖은 어깨를 부둥켜안으며 진흙에 빠진 다리를 서로의 다리로 지지하며 일어설 수 있겠지요. 결혼이 0회차이지 사랑은 0회차가 아닌 저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쟤는 나 없으면 안 돼’라는 말만은 부러운 것을 보면, 두 사람 맺어지지 않으면 안 될 사이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또 가족으로서 그려나갈 궤적이 무척 궁금합니다. 친구로서 두 사람의 인생 궤적을 가까이 봐 왔습니다. 참 부단히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리석다 싶을 만큼 정공법으로 성실했고, 가족과 친구, 이웃을 챙기는 마음이 살뜰하여, 조금 이따 저희가 뷔페 먹으며 갈비 배 있고 국수 배 있고 디저트 배 다 따로 있다 말 할 것처럼, 남을 챙기는 품성이 따로 또 있나 싶었는데, 좋은 심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노력하는 것임을 두 사람을 통해 제가 배웠습니다.

서로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한 OOO, ㅁㅁㅁ 라는 운명의 선이 친구로 만나 연인이 되며 단단하게 엮이더니 이제 부부라는 하나의 선이 되어 길고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려나가려 합니다. 실로 궁금하고 기대가 아니 될 수 없습니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면 둘이 되는 게 아니라 또 하나가 된다는, 비혼 싱글은 모르는 마법 같은 순간을 눈부시게 반짝거리며 살아가 주길 기대합니다. 이들이 주변에 흩뿌릴 기쁨, 부단히 노력하며 보낼 따뜻한 마음 역시 큰 기대가 되고요.

내 사랑하는 친구 OOO, ㅁㅁㅁ. 둘이 연인으로서 잘 지내왔듯 부부로서는 더 멋지게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며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너희 두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랄게. 결혼 축하해.

감사합니다.